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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철학/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2012)

요약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아를 확립하는 면역학적 시대였던 지난 세기와 달리, 21세기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신경성 질환(우울증, ADHD, 소진증후군 등)의 시대이다. "~ 해서는 안 된다"의 부정성으로 사회를 통제했던 규율사회와 달리 성과사회에서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사회를 지배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기꺼이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를 가장한 자기 착취는 보다 효과적으로 한계 없는 착취를 수행한다. 성과주체는 더 많은 일을 더 빠르게 처리해내는 데 유리한 주의 구조를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잠시 멈춰 돌이켜 생각하는 것, 주의 깊게 보는 것,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이 고립된 자폐적 성과기계는 자아에 의해 질식하고 과잉행동에 의해 소진된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자아-피로에 대비하여 한트케의 우리-피로를 제시한다. 우리-피로는 자기 안으로 한껏 쪼그라든 정체성의 긴장을 살짝 이완시켜 세계와 자기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흐려진 경계로 인해 세계는 자아 내부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우애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공동체의 가능성이 마련된다.

 

주요 개념

  • 부정성의 소멸, 긍정성의 과잉, 경색, 자폐, 고립
  • 성과사회와 성과주체, "할 수 있음", 자기 착취, 과잉행동, 최후의 인간
  • 깊은 심심함 - 정신적 이완의 정점,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 사색적 집중
  •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상의 황혼)
  • 근본적 피로, 개별자들의 공동체, 피로의 영감, 놀이의 시간

 

감상: 고립된 주체는 피로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위로의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자신의 우울을 고백하거나, 우울한 이들에게 공감하며 괜찮다고, 너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해주는 콘텐츠들.

좀 더 나아간 것들은 너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 너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 무시해버려라 하는 조언까지 덧붙인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경쟁, 불쾌하고 무례한 타인들의 존재에 너무나 지친 나머지,

보편적인 위로가 필요한 시대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위로들이 우리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을 넘어서서 타자를 만날 수 있을까.

 

한트케가 개별자들의 공동체로 예시한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좌, Balthasar van Ask / 우, Jan Bruegel)

 

한병철은 한트케를 인용하며 우리-피로(근본적 피로)가 개별자들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서로가 다른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도 모두가 나란히 함께 있는 공동체에 대한 그의 표현은

내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다.

 

술 마시고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잠깐 밖에 나왔다가 다시 술집으로 들어갈 때,

따뜻한 조명 아래 웃고 이야기 나누며 술 마시는 사람들,

빈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을 보는 사장의 모습,

가게 밖에서 문 틈 사이로 분위기를 살피며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나가듯 눈에 담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

 

자아의 조임쇠가 살짝 풀리면서 세계와 나의 경계가 흐릿해진다는 느낌이,

무차별적인 우애의 감각이 이런 분위기와 비슷하려나.

공간 안에 적절히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

선형(線形)의 감각이 아닌 공간감.

자기에게 집중된 관심이 이완을 통해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새 나가는 순간.

목적 없이 존재를 향유하는 공간.

 

게으름뱅이의 마을이 그런 공간이면 좋겠다.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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