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나는 '게으름뱅이의 마을'이라는 아이디어가
어린 시절 자는 것에 대한, 먹는 것에 대한,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저항하여
상상적으로 구성한 대안적인 삶의 공간이자 가상의 공동체라고 밝혔다.
더 크게 보자면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구상과 고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 게으름뱅이인가.
이 주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였으나,
끝내 '게으름뱅이'라는 개념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아마도 이 고민은 이후에도 지속해야 할 것으로 보이므로,
이쯤에서 변화의 과정을 기록해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로 옮긴다.
이번 글에서는 왜 처음에 게으름뱅이에 주목하였으며,
어떻게 게으름이라는 의미를 전복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그러한 전복의 시도는 어떠한 한계를 갖는지,
게으름뱅이라는 개념의 적절성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량과 체력 상의 이유로 아마도 다음 기회에 적어야 할 것이다.
1. 게으름뱅이에 주목한 이유
나의 경우 '게으름'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을 연상하게 한다.
집에 오면 씻기도 전에 드러누워 핸드폰 보기,
그러면서 씻고 잠 잘 준비를 미루고 미루다가 간신히 씻고 다시 누워서 핸드폰 보면서 잠들기를 미루기,
그렇게 평소에는 4-5시간씩 자며 연명하다가 주말에 12-3시간씩 몰아서 자기,
건강과 환경을 위해 요리를 해 먹겠다는 의지는 간 데 없이 배달음식 또 시켜먹기,
운동하겠다는 의지는 간 데 없이 또 드러눕기,
읽으려고 사둔 책 몇 년째 안 읽기, 쓰레기 분리배출 미루기, 도전에 대해 생각만 하고 미루기 등등.
나 자신이 나에게 부여한 과업과 나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을 사용하는 태도에 있어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일 때 나는 나 자신을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조금은 연민했다.
생각한 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게으름은 비난할만한 것이었고,
나라는 주인의 명령에 지치고 저항하는 노예인 나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게으름뱅이에 주목한 이유는 지친 나를 옹호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게으른 게 아니라 지친 거라고, 잉여한 것이 아니라 고갈된 것이라고 변론하고 싶었다.
규율사회의 명령이 어떻게 주체에게 내재화되어 성과주체를 만들어내고
그는 어떻게 고갈되고 소모되는지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잘 설명하고 있으니 이를 참고하면 좋겠다.
2. 게으름의 일반적 의미
- 과업과 시간을 대하는 태도
- 지침(exhausted)과의 구별 필요
예전에 비해 최근에는 여가시간에 누워서 모니터만 보고 있는 상태에 대한 관대함이 많아진 듯하다.
자신의 고갈을 인정하고 돌보려는 노력을 많이들 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성과사회에서 다른 무엇으로,
우리 스스로가 성과주체, 우울한 주체에서 다른 무엇으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필사적으로 우울을 외면하며 성과사회를 지속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미 많은 사람들은 게으름이라는 태도와 고갈이라는 상태를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
이제 와서 게으름이라는 의미를 굳이 전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게으름과 지침을 구별하는 사회가 도래하였음에도,
나는 '게으름뱅이'라는 주체의 유형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침과 구별되는 게으름의 고유한 의미에 대해 내가 계속 신경쓰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게으름의 고유한 의미를 나는 어떻게 설정하고 있기에
이를 추구할만한 주체의 유형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 해명이 필요할 듯하다.
3. 게으름의 의미 전복
- 생산과 효용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상태
- 쓸모에 봉사하지 않는 것들을 창조할 수 있는 상태
일반적으로 게으르다고 말하는 태도는 사실은 지치고 소진된 자의 모습이다.
지친 자는 아픈 자와 마찬가지로 능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자이다.
여기다 대고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침과 구별되는 게으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게으름이라는 개념의 적절한 자리는 어디인가.
이 단어의 적절한 용법은 무엇인가.
게으름이라는 태도에서 고갈과 결핍으로 인한 반응인 부분을 제외해본다면,
게으름이란 풍요와 충만의 상태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풍요와 충만의 상태에서 우리는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풍요와 충만의 상태는 부족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으며 과잉에 대한 욕심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부족과 과잉은 기압 차이와 같아서 이것의 균형을 맞추려는 운동이 바람을 만들어낸다.
풍요와 충만은 부족과 과잉을 제거하고 고요한 균형의 상태로 인도한다.
아마도 우리(혹은 우리 중 많은 이)는 그러한 균형에 도달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균형의 상태에 이른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
우리 스스로가 충만하여 욕심낼 이유가 없고,
우리의 주변 또한 충만하여 나눌 필요가 없는 상태에 이른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
그제야 우리는 게으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친 인간과 구별되는 게으른 인간의 자리를 이렇게 마련하고자 한다.
우리는 생산과 효용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게으를 수 있다.
그때서야 우리는 이윤을 위해 교환하는 것을 멈추고, 향유하기 위해 증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말의 주인은 따로 있다. 출처를 밝혀야 하는 상황은 아니긴 하지만, 증여받은 말임은 밝히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위와 자리가 아닌 호기심과 탐구심을 위해 연구하고,
상품이 아닌 아름다움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춤추고, 계산이 아닌 사랑을 위해 노래할 것이다.
이익이 아닌 정의에 대해 토론하고, 도덕이 아닌 윤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쓸모에 봉사하지 않는 것들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4.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
여기까지 적는 와중에 무수한 보론들을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하였다.
나의 생각임에도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참기 어렵다.
그렇지만 글의 구성상 그걸 다 끼워넣다보면 너무 길어지고
또 나의 집중력이 그것을 감당할만큼 좋지 못한 탓에
결국 또 글을 마무리짓지 못하게 될 것이어서
일단은 여기서 마무리 짓고 다음을 기약한다.
끝.
'마을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게으름뱅이의 마을이란 무엇인가. (0) | 2022.01.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