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을 철학/참고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보물창고, 2013)

 

요약

이야기는 한 변호사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화자는 부자들의 재산권을 관리하는 변호사로, 안전과 갈등 없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화자는 두 명의 필경사(를 고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오전 오후 교대로 발작적인 증세를 보이곤 했다. 업무가 증가하여 화자는 세 번째 필경사를 추가로 고용하는데 그가 바틀비이다. 바틀비는 다른 두 고용인과 달리 침착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화자는 자신의 사무공간의 구석지고 파티션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자리에 바틀비의 근무공간을 마련한다. 바틀비는 먹지도 쉬지도 말을 하지도 않은 채 엄청난 양의 일을 기계처럼 처리했다.

바틀비의 출근 3일째 되던 날, 화자는 바틀비에게 필경사의 필수 업무인 필사본 검토 업무를 지시한다. 놀랍게도 바틀비는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바틀비는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대답을 하면서도 조금의 감정적 동요나 흔들림도 없는 태도를 보인다. 이 때문에 화자는 크게 당황하는 한편 두려움마저 느낀다. 이후에도 바틀비는 아주 사소한 지시일지라도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한다"라고 답하며 지시에 응하지 않는다. 어느덧 바틀비는 필경 업무조차 거부한다. 그는 마치 기둥처럼 사무실 한쪽에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화자는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바틀비를 이해해보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바틀비와 대화하거나 그를 해고하려는 화자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화자는 결국 바틀비를 남겨둔 채 사무실을 이사함으로써 상황에서 도망친다.

화자가 이사한 후에도 바틀비는 건물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건물주는 그를 부랑자로 신고해 바틀비는 교도소에 수감된다. 화자는 바틀비에 대한 동정심에 교도소를 찾아가 바틀비와 면회하고 교도소의 사식 요리사에게 바틀비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해줄 것을 부탁한다. 바틀비는 교도소 마당인 뜰의 한 구석에서 담벼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식사조차 하지 않았다. 며칠 뒤 화자는 담벼락 아래 눈을 뜬 채 숨을 거둔 바틀비를 발견한다.

나중에, 화자는 바틀비가 이전에 수취인의 사망 등의 이유로 배달할 수 없는 우편물들을 소각하는 일을 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감상

『피로사회』(한병철, 2012)에서 탈진한 인간의 전형으로 바틀비를 거론하여 이 작품을 찾아 읽게 되었다.

 

"I would prefer not to -"라는 구문이 만들어내는 파괴적인 효과와 그 말의 존재태인 바틀비의 삶은 

우리에게 기묘한 무언가를 암시한다.

우리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한 희미한 감각은 느낄 수 있다.

다행히도 인류 중에는 철학자 또는 문학가라고 부를만한 프로 사유꾼들이 있어

그들의 예민한 감각과 통찰로 이 '무언가'에 대해 해석해놓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1. 바틀비에 대한 해석

바틀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다소 과격하게 나누자면 두 부류인 듯하다.

하나는 바틀비를 노동하는 인간 내지는 부정하는 인간으로 해석하고,

다른 하나는 긍정과 부정의 사이에서 인내하며 무(無)에 다다르는 존재로 해석한다.

 

 

작품을 읽고 나서 보니 바틀비를 노동하는 인간 내지는 부정하는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작품의 의미를 너무 축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합니다'라는 바틀비의 상투어는 단순한 노동의 거부나 권위에의 저항이 아니다.

바틀비는 노동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나 생명유지를 위한 식사조차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때문에 그의 저항은 노동해방 등등의 정치적인 차원과는 다른 수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틀비를 탈진한 인간의 전형으로 소개한 한병철의 해석은 첫 번째 부류에 해당하겠다.

한병철의 경우 바틀비를 성과주체가 아닌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로 보고 있으면서도

바틀비의 이야기를 성과주체의 병리학적 특징인 탈진으로 해석해내는 모순을 보인다.

바틀비를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로 해석한 이유는

'~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합니다'라는 바틀비의 말을 면역학적 시대의 부정성의 변증법으로,

즉 타자의 부정성으로 인한 자아의 붕괴를 피하기 위해

자아의 편에서 타자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틀비의 거부는 이질적인 타자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더구나, 앞서 말했듯이, 만약 바틀비를 복종적 주체라고 해석한다면 그의 이야기를 탈진으로 읽어내는 것은 모순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두 번째 부류의 해석이 이 텍스트의 고유한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밝혀내고 있는 것 같다.

 

'~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는 상투어는 명령이나 부탁, 제안의 내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승락하거나 거절하는 것 중에 답하라는 명령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요구에 답하지 않음으로써 바틀비가 파괴하고 있는 것은 변증법 그 자체이다.

 

바틀비의 상투어를 부정으로 해석하는 경우에는

'~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라는 표현을 '~ 하지 않겠다' 또는 '~ 하고 싶지 않다'로 대체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틀비는 고집스럽게 '~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라는, 독특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사실상 바틀비는 이 말 밖에는 하지 않으며, 차라리 그는 말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not to'로 인해 긍정도 아니고 'prefer'로 인해 부정도 아닌 이 상투어만이

긍정과 부정의 요구를 파훼할 수 있다.

 

다양한 출판사에서 이 책을 출간한만큼 'I would prefer not to'를 어떻게 번역할지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 '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하지 않고 싶다', '그러고 싶지 않다' 등등

다양한 표현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읽기에는 '그러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는 번역어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이 표현은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인데다가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I would prefer not to'의 효과를 가장 잘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긍정과 부정의 요구를 파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2. 바틀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멜빌은 바틀비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바틀비를 관찰하는 변호사의 서사이지, 바틀비의 서사가 아니다.

예컨대 카프카는 단식곡예사가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줄 때 비참함을 느낀다는 것을,

카뮈는 주인공이 총을 쏠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각 인물의 입장에서 밝혀놓는다.

그러나 멜빌은 바틀비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다.

 

덕분에 바틀비는 오직 '존재라는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을 연출하게 된다.

우리는 그를 인과의 선상에서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멜빌은 이러한 서술방식을 통해 바틀비를 서사(구상과 서술)로부터 고립시킨다.

그의 상투어가 긍정과 부정의 요구를 무너뜨려 존재의 자리를 마련하는 방식과 같이

이러한 고립을 통해 바틀비라는 캐릭터는 서사에서 해방된 순수한 존재가 된다.

 

다만 멜빌은 소설의 마지막에 어떤 힌트를 넣어놓는데,

이 또한 바틀비에 서사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보기보다는

바틀비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문제의식에 대한 힌트로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처음에는 '바틀비는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감상을 쓸 생각이었다.

멜빌의 힌트를 통해 어느 정도 서사를 구성할 수 있었음에도 도무지 글이 전개되지 않았다.

며칠 간 씨름하다가, 저 질문 자체가 이미 실패한 것으로 밝혀진 변호사의 질문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바틀비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려는 변호사의 시도는 자신의 인간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멜빌이 바틀비라는 존재를 서사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다면

바틀비에 서사를 부여하는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수정하고자 한다.

바틀비라는 존재의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은 무엇인가?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바틀비』와 이에 대한 다양한 평론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건대,

어쩌면 바틀비는 존재자를 탈색하여 순수한 존재 상태로,

이를 넘어 존재의 소멸로 이어지는 조류에 휩쓸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글을 멈출 수밖에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도구가 더 필요하다.

도구를 좀 더 갖춘 이후에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오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여기서 멈추고 다음 책을 읽자.

 

 

 

참고

질 들뢰즈, 비평과 진단: 문학, 삶 그리고 철학 (인간사랑, 2000)

모리스 블랑쇼, 카오스의 글쓰기 (그린비, 2012)

 

더 읽을거리

엠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 도래하는 공동체

'마을 철학 > 참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치다 타츠루, 로컬로 턴 (이숲, 2022)  (0) 2022.06.16
한병철, 피로사회 (2012)  (0) 2022.01.20